부평부 지도 『여지도서(輿地圖書)』
인천의 대표적인 산성 유적으로는 삼국시대의 문학산성과 계양산성이 있다. 그 중 계양산성은 2000년대에 들어 발굴 조사가 시작된 이후 2019년까지 10차 조사가 완료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간 계양산성에서 발굴 조사된 성과를 재조명하면서 막연히 알고 있던 계양산성의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마련한 것이다.
계양산 일대는 고려시대 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육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에는 “계양군에서 나가는 길은 오직 한 길이 육지에 통할 뿐, 세 면이 모두 물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물가였던 계양산 주변은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모두 개간되어 육지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변이 물가였을 정도로 지대가 낮았던 부평 지역에 솟은 계양산은 인근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인천의 북부와 한강 하류 지역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성을 축조하여 군사적으로 공격과 방어가 용이하도록 한 것이 계양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9~1674)와 같은 문헌에 의하면 옛사람들은 계양산성이 삼국시대에 쌓여진 석성이며, 1,937척의 길이로 축조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는 아마 조선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온 기록일 것이다.
북문지
제 1·3 집수정
계양산성 시설물에서는 시기를 알 수 있는 각종 토기, 기와, 석제품, 철기들이 출토 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내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마련한 집수정에서 출토 된 목간이다. 목간은 다듬은 목재에 먹글씨를 쓴 것인데 계양산성의 목간은 백제나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간의 기록 내용은『논어(論語)』의「제5편 공야장(公冶長)」부분으로 이와 똑같이 기록된 목간이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논어의 습서용 목간은 당시 유학이 전래되어 학습되었음을 말해 준다. 계양산성에서는 이른 시기의 유물로 백제시대 주로 사용되었던 둥근바닥 항아리와 고구려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암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기와 기와는 신라시대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는 이 시기 한강 유역에 분포한 삼국시대 산성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계양산성과 교통로로 연결되는 호암산성, 양천고성 등에서도 모두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7~8세기에 사용되었던 토기와 기와류 등이 확인되었다.
목간
종이가 지금처럼 많이 없던 고대에 목재를 다듬어서 길게 만든 판에 먹으로 글씨를 쓴 것을 말합니다. 간단한 메모나 종이에 쓰기 전 연습 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계양산성에서도『논어』가 기록된 목간이 발견 되었습니다.
연화문 수막새
수키와의 끝을 막아 목재의 끝이 썩는 것을 방지하는 기와의 부분입니다. 원형의 막새 안에는 제작 시기에 따라 다양한 문양을 사용합니다. 계양 산성에서는 연꽃 모양이 새겨진 수막새 기와가 발견되었습니다.
중국 자기
계양산성에서는 토기뿐만 아니라, 청자와 백자 같은 자기들도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의 자기들도 발굴되었습니다. 당나라에서 수입된 자기를 사용할 정도로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둥근바닥 항아리
바닥이 둥글고 목이 짧으며 몸통이 볼록하게 생긴 항아리를 말합니다. 주로 백제시대에 사용되었습니다. 계양산성에서는 제1집수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줄무늬병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그릇의 종류입니다. 목이 좁고 바깥면에 여러 세로 줄무늬가 찍힌 토기입니다.
명문 기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기와입니다. 계양산성에서는 많은 명문 기와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기와에는 삼국시대 부평 지역의 이름인 '주부토(主夫吐)'와 '월, 초(月, 草)' 등이 새겨져 있었습니다.